[홍호수 목사의 길 ①] 아버지의 장례에서 시작된 목회의 길
개척목회에서 교단 행정으로… “나는 교회를 지키는 일을 해야겠다”
본문
<대한민국 기독교 인물 열전 29>
홍호수 목사가 처음 목회를 배운 곳은 강단이 아니었다. 장례조차 치르기 어려웠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였다. 그는 모태신앙인이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봄, 친구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가족 가운데 가장 먼저 교회에 출석한 사람도 그였다.
어린 시절은 가난과 가까웠다.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고, 어린 홍호수를 돌볼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당시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에 갔던 기억을 갖고 있다. 아버지가 넝마를 주우러 가면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간경화를 앓았다. 병은 가족의 삶을 흔들었고, 가난은 병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홍 목사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병세는 악화됐다. 그는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했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홍 목사는 기억한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족은 또 다른 막막함 앞에 섰다. 장례를 치를 돈이 없었다. 형과 누나들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장례 절차를 맡아 진행할 사람도 없었다. 홍 목사의 기억에 따르면 가족은 아버지의 시신을 방에 모셔놓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교회가 알게 됐다. 권사의 연락을 받은 목회자가 장로들과 함께 집으로 찾아왔다. 홍 목사의 아버지는 그 교회의 성도가 아니었다. 목회자와 특별한 인연도 없었다. 그러나 목사는 직접 시신을 닦고 염을 하고 입관을 도왔다. 고향인 전남 장성까지 장례를 치르러 갈 수 있도록 차량도 마련했다고 홍 목사는 회고했다.
소년 홍호수는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 목사님 모습이 그냥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게는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나도 목사가 돼서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처음 목회를 본 곳은 강단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의 몸을 닦고 남겨진 가족 곁에 서는 목사의 손이었다. 그 장면은 훗날 그의 목회 방식으로 남았다.
홍 목사는 목회하던 시절 성도의 장례가 생기면 예배만 인도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가능하면 장례 기간 동안 현장에 머물렀다. 신발을 정리하고, 음료를 나르고, 상을 닦고, 물건을 옮겼다.
“성도들 장례가 생기면 3일 동안 장례식장에서 머물렀습니다. 예배도 드려드리지만 신발도 정리하고 음식도 나누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습니다.”
어느 장례식에서는 친척 한 사람이 “저 사람은 친척도 아닌데 누구냐”고 물었다. 교회 목사라는 대답을 듣고 놀랐고, 장례가 끝난 뒤 자신도 교회에 나가겠다는 일을 홍 목사는 아직도 기억한다.
홍호수 목사에게 목회는 처음부터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가장 막막한 시간에 그 곁에 남아 있는 일이었다.
도박장 앞에서 다시 물은 목회의 길
홍호수 목사는 약 16년 동안 개척목회를 했다. 그의 삶의 방향을 다시 바꾸는 사건은 목동에서 목회하던 시절 일어났다.
교회는 주상복합건물 상가 지하에 있었다. 교회 맞은편에는 오락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곳이 이른바 ‘바다이야기’ 도박장으로 바뀌었다.
당시 홍 목사는 상가 관리단 회장도 맡고 있었다. 도박장 측이 공용통로 일부를 막아 영업하자 그는 안전과 소방 문제를 제기했다. 관리단 차원에서 시정을 요구하고 구청에도 문제를 알렸다고 한다. 결국 영업정지 조치가 내려졌고, 이후 도박장 관계자들과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가족을 언급하는 위협성 말을 듣기도 했고, 술에 취한 사람이 사택에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몸싸움을 둘러싸고 경찰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고 그는 회고했다. 무엇보다 도박장이 들어선 뒤 교회가 운영하던 어린이 선교원에 아이를 보내기를 꺼리는 부모가 생기면서 목회에도 영향을 받았다.
개인적인 가정사까지 겹쳤다. 그는 목회의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를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왔고 16년 목회를 했는데, 이제 이 목회자의 길을 그만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 과정에서 홍 목사의 마음에 남은 방향은 ‘교단 행정’이었다. 그는 목회를 내려놓고 곧바로 교단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자신이 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목회자가 교단 총무에 도전하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정을 공부했다. 목회와 병행해 행정학 석사과정을 밟았고 이후 박사과정까지 이어갔다고 설명한다. 교단신문에는 교단 조직개편에 관한 글도 약 1년간 기고했다. 특정 인물이 바뀔 때마다 조직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를 바꾸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때 세운 생각 가운데 하나는 이후 그의 행정관을 설명하는 문장이 됐다.
“사람이 바뀌어도 조직이 건강하면 그 단체는 계속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그는 대신총회 총무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홍 목사는 이 변화를 ‘목회를 포기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목회를 그만두면 나는 교회를 지키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교회의 담임목회에서 교단 전체를 위한 행정으로 활동 공간을 옮겼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통합의 선택, 상실의 기억
그 길에서 가장 큰 선택 가운데 하나가 대신과 백석의 교단 통합이었다. 홍 목사는 당시 대신교단의 신학교 문제와 목회자 수급, 교단의 장기적 지속가능성 등에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백석과 대신이 통합함으로써 더 안정적인 신학교육과 교단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통합은 곧바로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소송이 이어졌고, 이후 교단 안팎의 재분열도 뒤따랐다. 홍 목사는 당시의 찬성 비율과 법적 쟁점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은 수치보다 그 선택이 남긴 흔적이었다. 통합은 그에게 성취라기보다 상실에 가까웠다.
“교단 통합 때문에 친구도 잃고 선후배도 잃었습니다. 내 신학적인 기반, 목회자적인 기반, 개인적인 기반을 사실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통합을 추진한 선택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옳다고 믿은 선택이 성공으로만 돌아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돌아갈 조직적 고향을 좁게 만들었다. 이후 그가 개교회 목회로 돌아가기보다 연합기관과 시민사회 사역을 계속하게 된 배경에도 이 경험이 자리하고 있었다.
홍호수 목사는 강단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할 교회의 범위를 넓혔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한 교회였다. 이후에는 교단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한국교회 전체였다. 그 선택은 그를 다시 광장으로 불러냈다. 2015년, 그는 또 다른 방파제 앞에 서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