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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호수 목사의 길 ②] 아무도 테트라포드를 바라보지 않았다
거룩한방파제 12년, 내려놓음과 다음세대를 향한 남은 기도

유현우 기자
작성일 2026-08-21 15:59

본문

<대한민국 기독교 인물 열전 29> 

등대는 멀리서도 보인다. 빛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등대를 바라보고, 등대를 사진에 담고, 등대를 기억한다. 그러나 파도는 먼저 등대를 향해 오지 않는다. 파도는 방파제 앞에 놓인 테트라포드를 먼저 때린다.

홍호수 목사는 어느 날 방파제 앞에 앉아 그 사실을 새삼 보았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한 것은 바다와 등대였다. 테트라포드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물속에 잠기고, 이끼가 끼고, 거친 파도를 먼저 맞는 구조물. 그는 그 모습에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보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서운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알려졌고, 각자의 이름과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자신은 대회가 끝난 뒤에도 남아 사무실을 지키고, 다음 해를 준비하고, 재정을 걱정해야 했다. 그 마음이 커졌을 때 그는 내려놓을 생각까지 했다.

그때 큰 파도가 밀려왔다. 물이 자신이 있던 곳 가까이까지 들이닥쳤다. 홍 목사는 그 순간 테트라포드를 다시 보았다.

“저 테트라포드가 없었으면 이 파도가 그대로 들어왔겠구나. 그때 ‘내가 맡았던 역할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 목사에게 테트라포드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먼저 파도를 맞는 사람들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난 12년 동안 자신의 자리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광장으로 간 목회자

2015년 홍호수는 또 다른 현장에 들어갔다. 서울광장에서 퀴어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다.

당시 그는 교단 총무와 한국교회 연합기관 관계자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었다. 홍 목사는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문제가 향후 교회의 자유와 다음세대의 가치관에 직접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사회적 시선도 존재했다. 그러나 홍호수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가 왜 이 문제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그의 설명은 앞선 선택과 연결돼 있었다.

“총무가 된 이유도 교회를 지키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고, 거룩한방파제를 시작한 것도 교회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개별 시민단체 차원이 아니라 교단과 연합기관이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총무들과 논의하고 교단 지도자들의 참여를 끌어내면서 국민대회의 틀을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홍 목사는 당시 자신의 여러 직함 가운데 거룩한방파제 사무총장을 특별하게 받아들였다. 사임을 앞두고 쓴 글에서도 교단이나 대학의 직함보다 양복 깃에 ‘거룩한방파제’ 배지를 365일 달고 다니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다고 밝혔다. 작은 배지는 그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표시였다. 

그러나 대형행사가 끝나도 실무는 끝나지 않았다. 대회 기간에는 수많은 단체와 사람이 모였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무실과 다음 대회를 준비할 실무는 남았다.

홍 목사는 초기 7~8년을 가장 어려운 시기로 기억했다. 사무실 운영과 간사 인건비 등이 어려울 때는 개인 재정까지 투입했다고 말했다. 사람이 필요하면 간사를 채용했다가 재정이 어려워지면 다시 줄이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회고한다. 그 과정에서 집회 및 시위와 관련해 여러 차례 벌금 등 사법처분도 받았다.

서울 중심의 집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역으로 갈수록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교회가 적다고 홍 목사는 판단했다. 유명 강사들은 주로 큰 교회에 초청받았지만 작은 교회와 지역의 목회자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기도하던 중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비행기 타고 가고 KTX 타고 가고 차를 타면 되는데, 조선시대도 아니고 왜 걸어가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길을 선택하게 만든 단어가 있었다. ‘진정성’이었다.

“내가 교회를 지키고 싶다는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차 타고 가는 것보다 직접 걸어서 찾아가면 다르게 받아들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국토순례가 시작됐다. 홍 목사는 인터뷰 당시까지 약 3,400㎞를 걸었다고 말했다. 순례 도중 두 차례 응급실에 실려 갔고 산길을 넘다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에게 국토순례는 단순한 캠페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말한 ‘교회를 지키는 일’에 몸으로 답하는 방식이었다.

사역의 뒤편에 남은 사람

긴 사역에는 균열이 생겼다. 홍 목사는 그 균열을 숨기지 않았다. 함께 활동했던 강사와 전문가 가운데 여러 사람이 한국교회에 알려지고 각자의 조직과 활동 기반을 갖춰가는 모습을 보면서 서운함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은 대회가 끝난 뒤에도 남아 조직과 재정을 걱정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 많은 인정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사무총장 사임을 앞두고 쓴 글에서는 당시 마음을 ‘상대적인 외로움과 밀려오는 재정적인 부담감’이라고 표현했다. 인터뷰에서는 더 솔직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은 다 들어주시는데 홍호수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고생은 되게 하고….”

그는 자신도 인정받고 싶었다고 했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결국 2022년 무렵 사무총장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 무렵 방파제로 낚시를 갔다. 낚싯대를 던져놓고 앉아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지나갔다.

“바다 예쁘다.” “등대 예쁘다.” 사람들은 등대를 찍었다. 그러나 테트라포드를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홍 목사의 시선이 그곳에 멈췄다. 위에 드러난 부분은 하얗지만 물 아래쪽은 검게 변하고 이끼가 붙어 있었다. 파도는 먼저 테트라포드를 때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에 서운함이 더 올라왔다.

왜 다른 사람들은 등대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는데 자신은 파도만 맞고 있는가. 그때 큰 파도가 밀려왔다. 물이 자신이 있던 곳까지 들이닥쳤고 그는 피해야 했다. 그리고 비로소 앞에 놓인 테트라포드를 다시 바라봤다고 한다.

“저게 없었으면 이 파도가 나를 그대로 쓸어갔겠구나.”

그 순간 자신의 역할을 다시 생각했다고 홍 목사는 회고했다. 

“내가 2015년부터 사람들을 섬기고 도와주면서 테트라포드 같은 역할을 했지만, 이 역할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구나.”

이어 성경에 나오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이 떠올랐다고 했다. 한국교회를 지키는 것은 몇 명의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 이름 없이 기도하고 자기 자리에서 버티는 수많은 성도와 목회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시기와 조급함을 돌아봤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그때 마음에 “겸손해라.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높이리라”는 말이 남았다고 회고했다. 신앙적 체험에 관한 그의 설명이다.

그가 테트라포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자신을 특별한 인물로 표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깨달은 테트라포드는 자기 자신 하나가 아니었다. 이름 없이 기도한 성도들, 현장을 지킨 목회자들, 드러나지 않는 실무자들, 각자의 자리에서 파도를 먼저 맞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하나로 서 있기를 바랐다.

내려놓음과 다음 세대

그 깨달음이 그의 서운함을 완전히 없애준 것은 아니었다. 2026년 사임을 이야기하면서도 홍 목사는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조직이 성장하면서 구성원 간 방향 차이가 생겼고, 자신이 생각했던 거룩한방파제의 역할과 다른 관계자들이 생각하는 범위에도 차이가 있었다.

홍 목사는 자신이 만든 조직을 둘러싸고 다시 분열이 생기는 일은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깨지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제가 내려놓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쓴 사임문에서는 내부 갈등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임 지도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내려놓았지만 아쉬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임에는 자신이 시작하고 오랫동안 지켜온 조직에서 물러나는 사람의 미련과 아픔, 그리고 조직의 분열을 피하려는 선택이 함께 있었다.

홍호수 목사에게 죽음은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간경화로 일찍 잃었고 자신 역시 오랫동안 같은 질환을 앓았다. 약 13년 전에는 혈관이 터지는 위기를 겪었다고 한다. 총회 일정 중 이상 증상이 있었지만 일정을 끝까지 감당하려다 병원 치료가 늦어졌고, 이후 중환자실과 혈관 시술을 거쳤다고 회고했다.

마취 없이 진행된 시술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사명이 있으면 살려주시고, 사명이 없으면 주님 앞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시술 중 십자가에서 피가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 같은 환상을 경험했고, 그 순간 “나는 살았구나”라는 평안이 찾아왔다고 홍 목사는 말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생존을 해석하는 신앙적 체험이다.

그러나 그가 당시 하나님께 바랐던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60세까지만 살고 싶었다. 이유는 아이들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일찍 잃으며 겪었던 빈자리를 자녀들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 결혼하는 것까지만 봤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는 실제로 아들과 딸의 결혼식을 보았다. 아들은 어린 시절 한때 목사가 되겠다고 했다가 가수가 되겠다고 말을 바꿨다. 아버지가 이유를 물었다. 아들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 아버지 주려고.”

홍 목사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을 돌아봤다고 했다.

“그때 ‘내가 뭘 잘못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들에게 목회자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으로 비쳤으면 돈을 벌어 아버지를 도와주겠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홍 목사는 자녀에게 목회자의 길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들이 대학에서 호텔경영을 공부하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결국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네가 결정한 네 인생이니까 아버지가 강요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과 목회자의 직업을 물려주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아들은 이후 큰 교통사고를 겪고 회복한 뒤 약 2년 동안 거룩한방파제 간사로 아버지의 사역을 도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난한 목회를 바라봤던 아들이 성인이 되어 아버지가 밤늦도록 집회와 경찰, 행정 실무 사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직접 경험한 셈이다.

홍 목사가 아들의 결혼을 위해 만든 영상에도 그 시간이 담겼다. 생사의 위기를 넘긴 아들과 가족의 시간, 아버지의 사역 현장, 그리고 결혼을 앞둔 아들을 향한 기도가 이어졌다.

홍 목사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자녀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를 두 가지로 나눠 말했다.

먼저 아버지로서였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아낌없는 나무처럼 희생했던 분이라고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는 다른 이름을 원했다. 

“우리 아버지가 목사였다고 하는 것보다, 정말 하나님의 종이었다고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그의 시선은 이제 손녀들에게 향하고 있다. 홍 목사는 현재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며 손녀들을 위해 반복해서 기도한다고 했다. 잘되고 성공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먼저 나오지 않았다.

믿음으로 자라게 해달라고, 선한 성품을 갖게 해달라고, 부모의 기쁨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한 가지 표현을 반복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한방파제 사무총장을 내려놓은 뒤 홍 목사는 청소년중독예방운동과 케일럽포럼, ‘The Good Fight! 선·한·싸·움’을 통해 다음세대 사역에 무게를 더 둘 예정이다. 거룩한방파제에서 축적한 경험과 젊은 전문 리더들의 역량을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주던 목사의 손을 바라보던 소년은 자신도 목사가 되기로 했다. 개척목회를 하다 교회 앞 도박장과 충돌한 뒤에는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며 행정으로 길을 바꿨다. 교단 통합에서는 많은 관계와 기반을 잃었다고 고백했고, 거룩한방파제에서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함 때문에 떠날 생각도 했다.

그때마다 그를 다시 움직인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묻는 일이었다. 한때는 그 자리가 강단이었고, 어느 때는 총회 사무실이었으며, 광화문의 거리와 전국의 도로이기도 했다.

이제는 가족예배 자리에서 뛰어다니는 손녀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홍호수 목사가 다음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것은 자신의 직책도, 조직의 규모도 아니라고 했다.

그가 바라는 기억은 오히려 짧았다.

“우리 아버지는 목사였다는 것보다, 정말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다고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등대는 멀리서도 보인다. 테트라포드는 이름도 없이 물속에 잠긴다.

홍호수 목사는 자신의 삶이 어느 쪽이었는지를 스스로 평가하기보다, 이제 다음 세대의 기억 앞에 조용히 서려 한다. 다만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을 자녀와 손녀에게 남기고 싶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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