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을 위한 손성무 목사의 30년] 1부 빈손으로 시작한 교회
본문
스무 살의 소명에서 합정동 첫 예배까지
1996년 1월 첫째 주일, 서울 합정동의 한 세미나실. 첫 예배를 앞두고 손성무 목사는 세 사람을 초청했다. 창립예배라는 특별한 형식을 갖추기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공동체를 위해 축복의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은 손 목사보다 열두 살 많은 선배 목회자였다. 그는 좋은 말을 이어 가다가 끝에, 청년 열 명 정도가 모여 시작하는데 이것이 과연 교회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출판사를 운영하던 장로였다. 그 역시 교회라면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야 하는데 청년들만 있는 이 공동체를 교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세 번째로 나온 사람은 손 목사와 동갑인 목회자였다. 그는 아예 이렇게 시작했다. “저는 오늘 축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충고하러 왔습니다. 이 교회 안 됩니다.”
세 사람 모두 근거 없이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청년뿐이었고, 예배당도 교단도 재정적인 기반도 없었다. 담임목사는 서른여섯 살이었고, 1년 전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세 식구에게 남아 있던 전 재산은 40달러였다.
안정된 목회를 떠나
1994년 12월 말,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손 목사는 수중에 40달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환율로 5만 원 남짓이었다.
그 직전까지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한인교회 담임목사였다. 서른한 살에 3대 담임으로 청빙받았고, 장년 출석은 80명에서 100명 사이였다. 교인 가운데 담임목사인 그가 가장 어렸다.
1994년 봄부터 한국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소식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가족을 처가에 보내고 며칠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끝에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안정된 미국 목회를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가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장로들과 교인들에게 사임 의사를 밝힌 이튿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70대 목회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근에서 100명 규모의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목회한 뒤 은퇴를 앞둔 사람이었다.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두 교회를 통합해 담임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었다. 안정적인 목회의 길이 다시 열린 순간이었지만, 그는 이미 귀국을 결정한 뒤였다.
교회는 재직 기간에 따른 규정보다 많은 퇴직금을 지급했다. 그 돈으로 세 식구의 항공권을 사고 이삿짐을 부치자 40달러가 남았다.
“미국 목회가 어려워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안정되고 만족스러울 때 떠났습니다.”
스무 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다
그가 목회자로 부름받은 것은 스무 살 때였다. 그때까지 그는 교회에 제대로 다녀 본 적이 없었다. 청소년기를 열등감과 좌절, 방황 속에 보냈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봄에는 삶의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삭발까지 했다.
어느 수요일 오후, 답답한 마음으로 고등학교 때 받은 신약성경을 펼쳤다. 첫 장에 나오는 족보를 읽다가 곧바로 덮었다. 그러다 찬송가에서 알고 있던 성탄 찬송을 발견해 불렀다. 한 소절을 마치기도 전에 세 번이나 통곡이 터졌다. 왜 우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찾아왔다.
그해 10월 하순, 견딜 수 없는 내적 고통 속에서 철야기도를 하기로 했다. 기도하는 방법조차 몰랐지만, 바깥 기도실에서 들려오는 청년들의 기도 소리를 따라 그 모임에 합류했다. 어느 순간 그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부르는 호칭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그 순간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확신도 찾아왔다. 기도를 마친 뒤 그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부르셨습니다. 신학교에 가겠습니다.”
교회 밖의 청년들을 향하여
20대의 그는 청년문화사역과 문서선교에 뛰어들었다. 1987년 대중음악과 청년문화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분석한 『팝 음악에 나타난 사탄의 활동』을 펴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낮은울타리, 목회와신학, 신앙계, 새벽이슬 등 여러 매체에 청년문화와 신앙을 주제로 글을 썼다. 한 달에 쓰는 고정 칼럼만 일고여덟 편에 이를 때도 있었다.
교계 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아 지면을 청년과 신학생, 목회자 중심으로 정비했고, 지역교회에서는 중고등부와 청년부를 지도했다. 서로 다른 열두 교회의 청년들이 매주 함께 모이는 연합찬양모임의 지도목사로도 섬겼다. 훗날 그의 사역 전체를 관통하게 될 연합의 씨앗은 이 시기에 이미 심기고 있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청년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문화 사이에 너무 큰 간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교회 밖에서 방황하던 청년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익숙하지 않은 다음 세대가 어떤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일흔 명을 돌려보내고 열 명과 시작
귀국한 그는 곧바로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1년 동안 준비하기로 하고 1995년 3월 말 처형의 아파트에서 네 명과 함께 기도회를 시작했다. 몇 주 뒤 성경공부로 발전했고, 그가 직접 교재를 만들었다. 4월에 시작한 모임은 10월이 되자 세 그룹 7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한 달만 더 계속하면 100명, 150명까지 모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지점에서 모임을 해체했다.
“선교단체 같은 분위기로 굳어질 것 같았습니다. 원래 지역교회를 준비하려고 시작한 성경공부였으니까요.”
그는 참석자들을 각자의 교회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마음을 주신 사람만 개척에 함께해 달라고 했다. 열 명의 청년이 남았다. 석 달 뒤 합정동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3년, 세 개의 장소
교회는 자체 예배 공간 없이 출발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일예배는 빈 공간을 서너 시간 빌려 모든 장비를 설치했다가 예배 후 철수했다. 수요일에는 서대문 기장 선교교육원에서, 토요일에는 종로5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모였고, 사무실은 아현동에 있었다.
1996년 12월 21일, 종로5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예배를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식의 예배였다. 예배의 첫 30분은 콘서트로 진행됐고, 헤비메탈부터 클래식까지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사용했다.
설교도 일반적인 강단 설교와 달랐다. 손 목사와 담당 전도사가 무대 위 라운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하이체어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토크쇼 형식으로 말씀을 전했다. 자살과 같은 주제를 다룰 때는 교회 영상팀이 신촌이나 명동 거리로 나가 시민들을 인터뷰했다. “자살 충동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2분 안팎의 영상으로 편집해 설교 도입부에 상영했다.
영상이 끝나면 두 사람이 그 주제를 성경적 관점에서 대화하듯 풀어 갔고, 설교 후에는 참석자들이 쪽지로 제출한 개인적인 질문에 답했다. 손 목사는 가운이나 양복 대신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설교했다. 교회에 익숙하지 않은 청년들도 자기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예배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시도였다.
이 열린예배를 통해 예수촌교회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새로운 예배 형식과 청년목회의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신학대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세 곳을 오가는 생활이 3년 가까이 이어지자 한계가 드러났다. 처음 온 사람이 예배 장소를 잘못 찾아가는 일이 생겼고, 세 곳의 대관료를 합한 금액도 적지 않았다. 결국 한 장로의 소개로 신촌의 한 빌딩 12층에 들어가 흩어져 있던 예배와 사역 공간을 하나로 합쳤다.
그러나 입주한 지 2주 만에 건물주 측에서 나가 달라는 연락이 왔다. 겨울에 다시 공간을 구해야 했다. 새로 찾은 곳은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120여만 원이었지만, 당시 교회에는 이를 감당할 재정이 없었다. 그때 한 청년이 박사과정을 위해 마련해 둔 등록금을 헌금했고, 다른 교인들도 십시일반으로 뜻을 모았다. 그렇게 마련된 헌금으로 새로운 예배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손 목사는 개척 초기 3년 8개월 동안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교인이 모두 청년이었던 교회의 헌금은 선교사 두 곳을 후원하고 장소 사용료를 내면 다음 주일까지 몇 만 원이 남을 정도였다.
첫 예배에서 축사를 맡았던 세 사람의 예상은 빗나갔다. 교회는 10년 넘게 이어졌고, 청년 출석은 200명을 넘어섰으며, 자체 예배 공간도 매입해 자립했다.그런데 2007년 5월, 손 목사는 자신이 세운 그 교회를 스스로 해체했다.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1995년 10월에도 그는 70명이 모이던 성경공부를 해체하고 열 명과 다시 시작했다. 두 번 모두 사역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 영향력이 커지고 있을 때 내린 결정이었다.
그가 왜 자신이 세운 것을 반복해서 내려놓았는지를 이해하려면, 2004년 장충체육관에서 시작된 한 청년기도운동과 그 이듬해 마석의 성찬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