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을 위한 손성무 목사의 30년] 2부 낮아지고 깨어지고 죽는 것 > 교단/교회 > CDN Christian Daily News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교단/교회

HOME  >  교계종합  >  교단/교회

[연합을 위한 손성무 목사의 30년] 2부 낮아지고 깨어지고 죽는 것

유현우 기자
작성일 2026-08-19 10:34

본문

어게인 1907에서 예수촌교회와 274 얼라이언스를 내려놓기까지

2005년 1월, 경기도 마석의 한 수양관. 성찬식이 진행되는 동안 손 목사는 빵과 포도주를 든 채 울기 시작했다. 전날 밤의 조별모임 때문이었다.

8개월 전 서울 장충체육관을 가득 채운 청년기도집회가 누구의 기도와 헌신으로 시작됐는지를 두고, 전국에서 모인 청년과 목회자 250여 명의 생각이 서로 달랐다. 교회마다, 단체마다 기억하는 출발점이 달랐다. 부흥과 연합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서는 그 역사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논의는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결국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회개했다.

다음 날 성찬상 앞에서 손 목사의 마음에 세 문장이 남았다.

"연합은 낮아지는 것이다. 연합은 깨어지는 것이다. 연합은 죽는 것이다."

장충체육관을 채운 청년들의 기도

어게인 1907 운동의 출발은 작은 기도모임이었다. 손 목사는 2003년부터 예수촌교회 성도들과 매주 목요일 저녁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과 같은 회개와 성령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기를 구하는 모임이었다.

2004년 봄, 몇몇 목회자가 만나 성령강림주일에 청년연합집회를 열기로 했다. 주최 조직도 대형교회의 동원도 없었다. 준비하던 목회자들이 예상한 인원은 수백 명이었다.

그해 5월 성령강림주일 밤,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7-8천명에 이르는 청년이 모였다. 공식 집회는 다음 날 새벽 5시에 끝났지만, 집회가 끝난 뒤에도 수백 명의 청년은 아쉬움 속에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이들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일부는 해가 뜬 뒤에도 체육관 주변에 남아 함께 예배하고 기도했다.

이 집회는 2005년 전국 5개 도시로, 2006년에는 13개 도시로 확산됐다. 중앙 조직이 지휘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교회와 청년 지도자들이 교단과 단체의 경계를 넘어 준비했다.

“확산의 동력은 조직력이나 유명 강사가 아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침체를 아파하며 하나님을 찾았던 청년들의 기도였습니다.”

그에게 어게인 1907은 성공한 대형집회의 기억이 아니었다. 부흥은 인간의 기획과 조직만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동시에 연합을 말하는 사람 안에도 자기 이름과 공로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직면한 시간이었다.

8312e54c0d29329d83f02de4e73eecaf_1787103203_6731.png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부르심이 되어

2005년과 2006년을 지나며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그의 마음을 붙들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는 교회의 하나 됨이 여러 좋은 사역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구하신 뜻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고 한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행사의 연합이나 조직의 통합을 넘어,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에 참여하는 영적인 실재라고 받아들였다.

2006년 3월, 며칠 동안 기도하기 위해 수양관에 들어갔을 때 두 가지 결론이 더욱 분명해졌다.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기 전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에베소서 4장 16절에 나오는 ‘마디’처럼 몸의 지체들을 연결하는 역할로 부름받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부르심을 따르려면 자신이 세운 교회와 담임목회자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52번의 주일

당시 예수촌교회에는 청년 200여 명이 출석하고 있었다. 자체 예배 공간을 매입했고 재정적으로도 자립했다. 개척 10년 만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예수촌교회를 유지한 채 연합사역을 시작하면 다른 교회와 단체들이 결국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모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해한 연합과 달랐습니다.”

주변에서는 교회를 기반으로 연합사역을 하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고 효과적이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촌교회가 더 큰 연합을 위해 깨뜨려져야 할 옥합과 같다고 생각했다. 연합을 말하면서 자신의 자리와 기득권은 그대로 지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결심 이후 그가 한 일은 성도들을 설득하고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약 1년 동안 주일예배 설교를 직접 맡지 않고, 가정교회를 섬기거나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꿈꾸는 여러 사역자를 강단에 세웠다. 자신이 이해한 교회를 혼자 설명하기보다 성도들이 다양한 사역자의 경험과 교회론을 들으며 함께 분별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52번의 주일이 지난 2007년 5월 20일, 예수촌교회는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의 30대와 40대, 10년이 넘는 땀과 눈물이 담긴 공동체였다.

“해체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저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연합을 말하면서 내 자리와 기득권은 그대로 지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촌교회 해체는 지역교회 자체를 부정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지역교회를 넘어 존재하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살아 보고 싶었다. 그 선택에는 분명 대가와 시행착오가 뒤따랐지만, 훗날 그는 당시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띵하우스, 자유와 한계

교회를 해체한 공간에서 여러 교회와 단체가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원띵하우스가 시작됐다. 특정 교회의 멤버십이나 인위적인 직위를 앞세우지 않고, 주일을 포함해 여러 사역자가 돌아가며 말씀을 전했다. 다양한 예배팀이 매일 예배를 섬겼다.

기도의 집은 단지 문제 해결을 위해 오래 기도하는 장소를 지향하지 않았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교회와 세상을 위해 중보하는 예배 공동체를 꿈꿨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함께 설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 가장 중요한 열매였다.

그러나 멤버십과 조직을 최소화한 구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지만 사람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훈련하며 책임 있게 세우는 일은 어려웠다. 안정적인 인적·재정적 기반도 약했다. 관계와 자발성은 살아 있었지만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질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기도의 집과 지역교회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기도의 집에는 예배와 중보, 초교파적 연합이라는 강점이 있고, 지역교회에는 성도를 돌보고 훈련하며 삶을 함께 책임지는 강점이 있었다.

그래서 2012년 1월 진행교회를 세웠다. ‘진행’은 ‘진정한 사도행전적 교회’, 곧 ‘Real Acts’를 의미했다. 기도의 집에서 발견한 예배와 기도, 연합의 영성을 이어 가면서도 성도들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훈련하며 삶을 함께 책임지는 지역교회의 필요성을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 기도의 집과 지역교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두 사역이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며 함께 가야 한다는 배움의 결과였다.

6년, 그리고 0회

기도의 집을 시작한 뒤 그 가치에 공감하는 목회자와 선교사, 지역교회와 기도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이 만남은 2008년부터 하나의 연합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처음 이름은 ‘원띵 네트워크’였다. 시편 27편 4절의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이후 IHOP의 ‘원띵 컨퍼런스’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조언을 받고 ‘274 얼라이언스’로 이름을 바꿨다. 시편 27편 4절이라는 의미는 그대로 남았다.

274 얼라이언스는 14개국 60여 개 교회와 단체, 국내외 풀타임 사역자를 포함한 약 500명의 네트워크로 확장됐다. 그러나 대표 직위도 중앙 조직도 정관도 두지 않았다. 각 교회와 단체가 자신의 정체성과 부르심을 유지하면서, 주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한 가지 가치로 연결되는 유기체적 네트워크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는 매년 1월 초 뉴시즌 컨퍼런스를 열었다. 일반적인 강의를 배열하기보다, 그해에 관해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 있는 사람들이 메시지를 나누도록 했다. 메신저가 이름 있는 목회자인지 청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첫해 컨퍼런스 둘째 날, 메신저 회의를 주관하던 손 목사의 마음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네가 이 컨퍼런스에서 아무 메시지도 전하지 않는 것이 네 메시지다.”

사흘째 밤, 마지막까지 한 번도 강단에 서지 않았던 그가 올라가자 참석자들은 특별한 메시지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전한 것은 폐회 광고였다. 사흘 동안 집회를 잘 마쳤으니 주위에 떨어진 휴지가 없는지 살펴보고 돌아가 달라는 내용이었다.

뉴시즌 컨퍼런스는 6년 동안 이어졌다. 그 기간 수백 명의 메신저가 짧게는 5분, 길게는 한 시간 동안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손성무 목사가 메시지를 전한 횟수는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만든 네트워크에서도 떠나

네트워크가 커지면서 역설적인 상황이 생겼다. 손 목사와 연합하고 싶어도 그의 배후에 274 얼라이언스라는 큰 네트워크가 있다는 사실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목회자들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하려면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판단하지 못해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참된 연합에 274 얼라이언스가 방해가 된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필요하겠구나.”

여섯 번째 뉴시즌 컨퍼런스 마지막 날, 그는 자신이 네트워크를 떠나겠다고 밝혔다. 함께했던 목회자들은 영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맡아 온 사람이 떠나면 어떻게 하느냐며 만류했다. 그러나 결국 그날 밤 모두가 그를 축복하며 파송했다.

그가 떠난 뒤 274 얼라이언스도 하나의 이름과 형태를 계속 붙들지 않기로 하고 자발적으로 해체됐다. 외형적으로 보면 사라진 조직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연결되고 훈련받은 청년 사역자와 공동체들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새로운 기도운동과 연합 네트워크를 시작했다. 하나의 조직이 커진 것이 아니라 사람과 가치가 여러 자리로 흩어졌다는 것이 274 얼라이언스가 남긴 열매였다.

11년 전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를 해체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만든 네트워크에서 자기 이름을 뺐다. 그러나 그가 옳다고 믿어 온 ‘조직 없는 관계의 연합’은 이후 더 큰 규모의 연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혹독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기사 공유하기
추천 0